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문단 편집) == 생애 == 1929년 12월 6일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인|오스트리아 시민권자]]로 태어났으며 출생 직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오스트리아]] [[그라츠]]로 가서 거기서 자랐다. 베를린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국적은 오스트리아이다. 부친이 [[벨기에]]쪽 혈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르농쿠르라는 프랑스계 성을 가지게 되었다. 양친이 모두 귀족 혈통인데, 부친은 벨기에 남부 아르농쿠르 마을의 백작 가문 출신이고 모친은 무려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 혈통이다. 즉,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3남)의 13번째 아들 요한 대공[* [[나폴레옹 전쟁]] 시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장군. [[바그람 전투]]에 지각하여 형 [[카를 루트비히|카를 대공]]을 분노시킨 인물이었다.] 외아들 메란 백작 프란츠의 아들인 메란 백작 요한 슈테판이 외할아버지이다. 즉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레오폴트 2세의 외고손자가 된다.[* 요한 대공은 평민인 안나 플로흘(Anna Plochl 1804~1885)이라는 우체국장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 아들인 프란츠는 [[귀천상혼]]에 의해 대공이 되지 못하고 백작으로 격하되었다. 요한 대공과 안나 플로흘의 이야기는 오스트리아에서 2009년 상영한 90분짜리 단편 드라마 '사랑하는 요한, 사랑하는 안나'(Geliebter Johann Geliebte Anna)에서 나온다.] 초등교육은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서 받고 음악은 오늘날 대학격에 해당되는 빈(Wien) 국립 아카데미로 가서 공부했으며 전공은 첼로다. 이런 화려한 집안 배경은 아르농쿠르가 보수적인 [[빈(오스트리아)|빈]]에서 성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아르농쿠르가 집안 배경만으로 출세한 지휘자라는 것은 아니다. [* 모친의 집안이 오스트리아 황실 가문인 것으로 알려진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스도 집안 배경의 후광과 수려한 외모 덕분에 빈 시민들에게 엄청난 인기와 사랑을 누렸다. 크라우스는 당시 재정난을 겪고 있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발탁되기까지 했다. 대공황의 위기가 지나가자 빈 필은 그에게 사퇴를 종용했지만, 크라우스는 이에 반발했고, 빈 필 단원들은 상임지휘자직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빈 필의 상임지휘자직 폐지는 임시적인 조치였지만 혼란스러운 시기가 이어지면서 상임지휘자직의 공석이 장기화되었고, 전통으로 고착되었다. 사실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라는 것은 불분명하고 허위 사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진위가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크라우스가 그런 인기를 얻었던 것을 보면 진짜 황실 가문 출신인 아르농쿠르가 집안의 후광을 받은 것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또 젊은 시절 상당히 미남이었다는 점에서도 클레멘스 크라우스와 유사성이 있다.] 그는 빈 국립음악대학에서 기악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첼리스트로 활동했다.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나치 독일|나치]]에게 재산 및 성채가 압류 당했지만 워낙에 [[금수저]]라 큰 생계 문제는 없었다. 종전 후 1952년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끌던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첼로 단원으로 들어갔고[* 카라얀은 아르농쿠르의 연주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어 뽑았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1969년까지 활동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